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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차 한잔에 그리운 쉼을 누리고 잠시 쉼에서 얻는 자유와 감사의 힘으로 peacemaker의 꿈을 꺼내 봅니다. 여전히 뒤죽박죽 작은 일들에 쫓기며 정신 없지만 내 안에 심어 주신 기쁨들 누리고 나누길 원합니다. 차 한 잔 추가~.^^
허니즈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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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비빔국수

2010. 6. 30. 13:32 | Posted by 허니즈맘

현숙언니의 열무비빔국수, 남편의 치킨 샐러드, 나의 김치 고로케(사온 것^^;), 현진이네 양파 초절임. 2010.6.26 저녁상차리기

현숙언니의 손길은 대접의 은사로 빛이 난다. 국수를 삶아 얌전히 감아 담고, 갖은 배합으로 정성들인 양념고추장, 솜씨 좋게 썰은 배 고명에 언니의 친정어머니께서 시원하게 담그신 열무김치와 그 국물... 사랑 가득한 예술입니다^^


사복음서의 부활증거

2010. 6. 30. 13:29 | Posted by 허니즈맘

06/23 '사복음서의 부활증거 -김형국목사-

 


"북한은 실질적으로 식량과 비료를 남한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거의 남한의 지원이 끊긴 요즘은 군인들이 민가에 내려와서 식량을 뺏어 가고 있다.

예전에 군량미로 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민간인에게도 가고 있었다.

우리의 북한 지원은 다시 새롭게 지속되어야 한다."
 

지난 석달 동안 전해왔던 사복음서의 '예수님부활의 증거' 총정리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 부활의 증거>


1. 혼란스런 증거

사복음서를 종합해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약간의 횬란이 있다.

부활의 장면에서 여인의 숫자에 따라

부활하신 만남의 장소...

이런 차이점 때문에 예수님 부활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 의문을 야기한다.

그러나,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관점이 부적절하다.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으로 삼는것

예수님은 사역을 한지 3년이 안된 젊은 청년을 정신적 지주로 미화하기 위해서

부활을 조작한다는 것과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사소로운 표기를 중요시 하는 문화가 아니었다.


증인이었던 여인들의 숫자 :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를 거론하지만

현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특정 이름은 선택적이었을 뿐이다.

 


2. 증거의 공통점

평범한 일상중에 만나셨다.

예수님을 만나 제자들은 그 이후 새로운 삶을 찾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확실한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할 뿐

사복음서의 차이를 수정이나 조작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각 책이 독특하게 기여하는 바가 다른 사복음서의 유익이 크다.

 


3. 사복음서 부활의 증거 돌아보기


*마가복음"16:1~8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빈무덤을 발견한다.

 부활현장의 증인 거론은 없다.

 끝부분에 "무서워서" 아무도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 하였다.

 이 책이 회자되고 있을 때에는 생명을 걸고 이 무서운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

 극적 대비를 드러낸다.

 (제자들조차 두려워했던 부활때문에 이후의 제자들의 삶은 고상함과 능력이 드러나고 있다)

 

*마태복음

못박힌 발을 붙들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이 놀라운 복음을 제자에게 땅끝까지 전하라 하시고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누가복음

여인들의 증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맘을 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심.

떡을 떼는 일상에서 만나 주셨다.

이방인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예수님의 비전을 보이셨다.

메시아 공동체로서 교회를 이루고 성령을 기다리는 백성.

 

*요한복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보여 준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때문에(받은 사랑에 대한) 빈무덤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학력, 지식, 신분, 명분이 자격이 되지 않는다.

그녀를 예수님의 메신저로 사용하신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내면에 참된 평화를 주신다. (붏안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성령으로 준비시키신다)


도마의 회의(진실한 고민)를 통해 진실에 이르게 하신다.


21장1~14

고기잡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 비천한 일터에(평범한 일상) 오셔서

그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신다.

아침을 차려 주시고 인격적으로 섬겨주셨다.


베드로의 회복 : 인격적으로 진실한 근심에 이르게 하셔서

그의 실패와 절망 중에 문제의 본질을 보게 하셔서 회복시키신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맡겨진 양을 먹이는 섬기는 삶을 살고,

비교하는 삶을 살지 말며 예수님을 따르는 고유한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님은 존경할 만한 성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다시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부활이 없었다면 고상한 희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케 하시는 새시대의 완성과 예수님의 새로운 통치를 말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때까지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능히 살 수 잇는 시대를 주셨다.

 


 

2. 성경을 통해 부활을 온전히 알게 하신다.


사복음서를 통해 알게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더이상 기적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복음서의 부활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깊이 묵상하게 하셔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소망을 갖길 원하신다.

 

 

3.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부활을(영광과 능력) 드러내셨다.


진리와 지식이 중요하지만 "사랑"을 통해 일하신다.

예수님의 이 땅의 사역은 "사랑의 회복"이었다.
  
지식은 필요하나 사랑이 더 중요하다.

 

 

4. 일상의 삶에서 따르게 하신다


장엄한 신비한 장면에도 임하시지만 일상의 삶속에서 동행하시며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일상 중에 주께서 우리를 섬기고 계심을 발견하길 원하신다.


복음 전수의 삶- 종말론적(끝이 있는) 삶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고 싶은가?


복음을 살아내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역사 속에 500여명 밖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되지 않았지만

대부분 널리 전해진 소식으로 믿게 되었고 성경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 들이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 말하는 사람

마음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우리가 진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세워 나갑니다.

진리에 집중합시다. 배웁시다, 묵상합시다. 그 진리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면 갈수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가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에 눈이 뜰수록 우리는 더욱 선명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 '라일락'을 듣다가

2010. 6. 28. 12:54 | Posted by 허니즈맘
http://cafe.daum.net/tlffos1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직접 타이핑하려니까 넘 낯설다.
자주 안 쓰는 단어처럼 써 놓고는 내 발음이 맞았나 다시 확인까지 해 본다^^;;
오랫만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려고 음악카페에 들어갔다가
라흐마니노프에게 '라일락'이라는 곡이 있는 걸 첨 보고 흐뭇하게 듣고 있다.
그리고, 내 아이디가 라일락이어서 좋다고 한번 더 흐뭇해 하는 중이다. 

내 아이디는 라일락이다.
왜 그런 낯 간지러운 아이디를 택했는지...^^;;

어릴 때부터 라일락향기와 그 꽃 모양도 몰입해 보면서 무척 좋아했다.
내가 자란 집에는 꽃나무도 일년생 꽃도 많았다.
그리 넓지 않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마당에 꽃이 지질 않았다.
그 집은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살았고 지금도 친정부모님이 사신다.
추억이 많고 집의 아늑함을 깊이 경험하고 살았다.
우리 가정사에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집을 지키신 부모님 덕이다. (감사하다)

여러 종류의 꽃을 보며 꽃모양과 향기를 맡으며 내맘에 가장 다정한 꽃은 라일락이었다.
집에 있는 라일락은 마루 창문 시야에서 벗어난 장독대 옆에 보라색과 흰색 꽃나무 두 그루이다. 눈에 띄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피어나 은은하게 바람 타고 수줍게 자기 존재를 터치해 오는 라일락은 끝내 나를 집밖으로 불러내곤 했다. 일년에 몇번 가지 않는 장독대 계단에 올라
그 가지를 쥐고 
소박하게 피어난 꽃더미에 얼굴을 묻게 하고 그 자잘한 귀엽고 섬세한 우주를
시간도 잊고 관찰하게 했다.

때때로 가지를 꺾어 집안에 들이고 싶었는데 채 피지 않은 꽃망을들이 안타까워 차마 그러진 못했다. 그런데, 가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몇 가지를 잘라 탐스럽게 꽃병에 꽂아
놓으셔서 집안 구석구석까지 그 향기가 가득했다. 가족들을 위한 어머니의 라일락 개화 세리머니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그 이후로 어른이 되어서까지 
나와 라일락의 매해 첫 만남은 해가 다진 한 밤중이었던 거 같다.
4월말이나 5월초의 바람은 쌀쌀하지도 않고 옷자락을 날려도 기분 좋은 그런 반가움인데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걷는 주택가 골목길에서 
갑자기 라일락 향기를 담은 바람 한자락을 느끼면
얼마나 설레이고 마음이 즐거웠는지 행복이 뭔지 알겠다 싶은 감동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눈을 뜰 때 "향기"라는 예쁜 말이 엄청난 파워를 지녔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소망하는 것이 평생의 과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을 "향기"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좀 가벼운 듯 싶기도 했지만 
라일락 향기가  떠오르면서 인위적인 백화점 향수에 갇혀있던 "향기"라는 말이 매우 고상하고  새롭게 다가와서 평생의 '거룩한 부담'조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루시리라 믿어지고 평안할 수 있었다. 

내가 내게 붙여준 아이디가 '라일락'인 것을 생각하면 비록 그것이 현실이 아닌 소망으로 간주하더라도 난 정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보인다.
그런데,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들이 내 발목도 잡는 나이가 되어서 거울을 보면 헉~ 향기까지는 몰라도 좀 실망스럽다. ^^;; 맨날 애들에게 곱지 않은 인상을 쓰고 내가 바라지 않는 주파수가 발달되고 잡음이 심하고 신경에 거슬리는 소통을 자진하다보니 내 미간에 입가에 얼굴 근육에 사나운 긴장감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어쩌다 셀카를 찍을 때, 혼자 있다가 무심히 거울을 보았을 때, 아이들 야단치고 화장실 들어갔을  때, 누군가 찍어준 사진에서 낯선 모습을 보았을 때... 난 좀 심하게 실망한다.

난 욕심 많이(?)  안 부리는데 왜 더 순탄치 않을까?

왜 더 맘이 편하고 자유롭고 고상하고 평화로운 소통만으로 살 수 없는거지? 
바보같은 질문으로 내 남다른 욕심을 드러낸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이끄신 은혜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러한 나의 실망은 얼마나 깊은 절망과 좌절이었을까 아주 끔찍했을 것이다.
난 좀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여전히 관심이 많고 자기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내 평생 영적 과제에 "자아도취" 그리고 "자기부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편인 내가 소박한 인생관을 갖은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름의 자아도취에 빠져 인간의 본질적 질문에 함몰구덩이를 겨우 피해다니고 살았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시커면 구덩이를 직면하고서도 생명이 있는 길을 분명히 보게 되었고 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힘들어서 때때로 무기력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라일락 향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소망이 있는 내삶에 새 힘을 얻는다.

우리 동네에는 라일락나무가 거의 집집마다 있었다.
요즘은 옛날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건물, 가끔 다세대 건물 한켠에 좁은 땅에 심겨진 것을 본다.
라일락을 가로수로 심은 길이 있으면 어떨까 재미난 상상을 하다가 
라일락 향수를 하나 구해 볼까 문득문득 그 향기를 그리워 하기도 한다.

이제는 외모나 이미지보다는 나의 영혼의 무게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얼굴을 그리워 하는 그 사모함이 더 깊어지는 것이 간절함이 되어서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이 무엇인지 평생 알아가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한다고 절절히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향기는 내 생명이 어떤 생각과 소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라일락만큼 매력적인 색깔있는 향기는 아닐지라도 라일락처럼 소박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삶이 되어서 반가움이 되고 위로가 되는 즐거운 손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009년 4월 친정집. 하얀 꽃나무가 라일락이고 그 뒤에 보라색 라일락이 하나 더 있다. 땅에 화분도 않은데 어둡게 나와 아쉽당^^; 부모님의 가정에 대한 애착이 드러나는 마당이다.


        

 
       

06/16 '요한의 부활증거4(요21:15-25) 

수요설교를 집에서 혼자 듣고 마음에 새기며 예배했습니다.


주일 밤에 컴을 드뎌 고치고 소리를 듣게 되어 나들목 예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구,  오늘도 수요 오전예배를 가려다 못 가면서  어제 이멜로

받은 오늘 수요예배에 대한 기대를 지난 주 수요예배 말씀을 사모하는 맘으로 돌리고

모처럼 들은 말씀을 동시에 컴으로 기록해 보았습니다.

우리 홍은 가족들은 수요예배에 참석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

제가 이렇게 올리는 나눔이 동일한 은혜가 흘러가는 또하나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사복음서에 드러난 부활의 메세지를 다루었고 오늘의 요한복음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마무리 한다.

본문 / 요21: 15~ 25

15~19 : 예수님과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20~25 : 예수님과 요한

 

 ---- 내가 부활하여 내가 부활의 주인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으니 "나를 따르라"

 

+나는 어떤 초점을 갖고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1. 나와의 관계 :

내가 아닌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잇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자신을 믿었다.
  
베드로는 철저히 3번이나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고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기쁘지만은 않다.

예수님의 현존에 비추이는 자신의 좌절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갈대)' 옛이름을 3번이나 부르시고 

('게바-바위' 라고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인격적 꾸짖음으로 좌절한 그에게 배려하셨다.

"나를 사랑하느냐?" 3번 물으시고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회복 시키신다.

완전한 사랑(아가페)을 요구하시지만 인간적 사랑(필레오)으로 가난한 맘을 드러낸다.


"베드로 너는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런 질문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경쟁적 사랑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고

베드로는 항상 자기의 의지와 혈기로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본질적 문제를 다루고 계시다.


불안하여no(17절) --슬퍼하며 깊이 근심하며

하나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주술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 근심과 고민을 촉구하신다. 
                     
---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내 사랑이 부족하지만 내 사랑에 대한 진심...  

    
     성장하는 예수 따르미의 진정한 고백

    내 신앙과 사랑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애통함)

 

2. 다른이와의 섬김의 관계

사랑한다면 수평적 관계가 된다. "내 양을 먹여라"

복음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을 돌보라

어떤 직책이 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섬기는 행함을 먼저 하라.

그 상황의 베드로는 실패한 직후의 어린 신앙인이었다.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내 양이다.

내 자녀, 내 남편, 내 가족이 내 양이고 좀더 눈이 넓어지면 맡겨진 양이 더 보인다.


양을 먹이는 것 --- 요10장  (선한 목자 예수님)

내가 직접 줄 수 없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먼저 내 인생의 답이 예수님이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댓가를 지불하는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3. 동역자들과의 관계

영적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비교를 하는 것이다.

현장의 7명의 제자들... 그 중에도 요한을 시기하고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20,21절)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 고유의 트랙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서로 다른 삶에 대해 상관하지 말아라(22절) 하신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여기에서 '너는' 이 강조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자신의 수준에서 자신의 가는 트랙에서

자신의 좌절에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고

내게 주신 자들을 사랑하며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을 따라 내 길을 가라고 하신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길 원합니다.


전 사실 어디서 부터 시작된 지는 모르겠지만
또는 그 잠재의식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지만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러는 것에 거부감이 심하고
전혀 그런 방법으로는 생각을 끊고 사는 것이 가능한 편입니다.
자랑이 아니고^^;; 그 거부감 저변에는 실수나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비교를 할 생각을 안 하는...^^;;

근데, 저의 생각의 잣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제 생각의 기준에 맞추어 시시비비를 가르게 될 경우에
편견에 의한 판단일지도 모르는데
적대감이 큰 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교만한 소취라는 생각을 하며 때마다 회개하지는 못하겠지만
자각을 할 때에는 참 괴로운 맘입니다.
때로는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다름으로 인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전 우습게도 대치되는 갈등상황의 스트레스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아시다시피 제가 웬만하면 회피하는 스타일 아닙니까?::

개선 점을 대안으로 나눌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겸허하게 사는 것이 제겐 살길입니다.

궁지에 몰려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와 대면하는 것이
가장 영적으로 힘든 경우인데
제 안에 긍휼이 없음을 발견하는 시점이 회개의 때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힘든 때는 어떠한 상황인가요?
너의 트랙과 남의 트랙을 인정하고
겸허히 생명 자체인 나에게 순종해라 메세지를 듣는 때는 언제인가요?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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