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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차 한잔에 그리운 쉼을 누리고 잠시 쉼에서 얻는 자유와 감사의 힘으로 peacemaker의 꿈을 꺼내 봅니다. 여전히 뒤죽박죽 작은 일들에 쫓기며 정신 없지만 내 안에 심어 주신 기쁨들 누리고 나누길 원합니다. 차 한 잔 추가~.^^
허니즈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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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요한의 부활증거4(요21:15-25) 

수요설교를 집에서 혼자 듣고 마음에 새기며 예배했습니다.


주일 밤에 컴을 드뎌 고치고 소리를 듣게 되어 나들목 예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구,  오늘도 수요 오전예배를 가려다 못 가면서  어제 이멜로

받은 오늘 수요예배에 대한 기대를 지난 주 수요예배 말씀을 사모하는 맘으로 돌리고

모처럼 들은 말씀을 동시에 컴으로 기록해 보았습니다.

우리 홍은 가족들은 수요예배에 참석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

제가 이렇게 올리는 나눔이 동일한 은혜가 흘러가는 또하나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사복음서에 드러난 부활의 메세지를 다루었고 오늘의 요한복음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마무리 한다.

본문 / 요21: 15~ 25

15~19 : 예수님과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20~25 : 예수님과 요한

 

 ---- 내가 부활하여 내가 부활의 주인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으니 "나를 따르라"

 

+나는 어떤 초점을 갖고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1. 나와의 관계 :

내가 아닌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잇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자신을 믿었다.
  
베드로는 철저히 3번이나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고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기쁘지만은 않다.

예수님의 현존에 비추이는 자신의 좌절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갈대)' 옛이름을 3번이나 부르시고 

('게바-바위' 라고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인격적 꾸짖음으로 좌절한 그에게 배려하셨다.

"나를 사랑하느냐?" 3번 물으시고 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회복 시키신다.

완전한 사랑(아가페)을 요구하시지만 인간적 사랑(필레오)으로 가난한 맘을 드러낸다.


"베드로 너는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런 질문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경쟁적 사랑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고

베드로는 항상 자기의 의지와 혈기로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본질적 문제를 다루고 계시다.


불안하여no(17절) --슬퍼하며 깊이 근심하며

하나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주술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 근심과 고민을 촉구하신다. 
                     
---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내 사랑이 부족하지만 내 사랑에 대한 진심...  

    
     성장하는 예수 따르미의 진정한 고백

    내 신앙과 사랑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애통함)

 

2. 다른이와의 섬김의 관계

사랑한다면 수평적 관계가 된다. "내 양을 먹여라"

복음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을 돌보라

어떤 직책이 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섬기는 행함을 먼저 하라.

그 상황의 베드로는 실패한 직후의 어린 신앙인이었다.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내 양이다.

내 자녀, 내 남편, 내 가족이 내 양이고 좀더 눈이 넓어지면 맡겨진 양이 더 보인다.


양을 먹이는 것 --- 요10장  (선한 목자 예수님)

내가 직접 줄 수 없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먼저 내 인생의 답이 예수님이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댓가를 지불하는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3. 동역자들과의 관계

영적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비교를 하는 것이다.

현장의 7명의 제자들... 그 중에도 요한을 시기하고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 (20,21절)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 고유의 트랙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서로 다른 삶에 대해 상관하지 말아라(22절) 하신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여기에서 '너는' 이 강조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자신의 수준에서 자신의 가는 트랙에서

자신의 좌절에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고

내게 주신 자들을 사랑하며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을 따라 내 길을 가라고 하신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길 원합니다.


전 사실 어디서 부터 시작된 지는 모르겠지만
또는 그 잠재의식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지만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러는 것에 거부감이 심하고
전혀 그런 방법으로는 생각을 끊고 사는 것이 가능한 편입니다.
자랑이 아니고^^;; 그 거부감 저변에는 실수나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비교를 할 생각을 안 하는...^^;;

근데, 저의 생각의 잣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제 생각의 기준에 맞추어 시시비비를 가르게 될 경우에
편견에 의한 판단일지도 모르는데
적대감이 큰 편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교만한 소취라는 생각을 하며 때마다 회개하지는 못하겠지만
자각을 할 때에는 참 괴로운 맘입니다.
때로는 시시비비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다름으로 인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전 우습게도 대치되는 갈등상황의 스트레스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아시다시피 제가 웬만하면 회피하는 스타일 아닙니까?::

개선 점을 대안으로 나눌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겸허하게 사는 것이 제겐 살길입니다.

궁지에 몰려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와 대면하는 것이
가장 영적으로 힘든 경우인데
제 안에 긍휼이 없음을 발견하는 시점이 회개의 때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힘든 때는 어떠한 상황인가요?
너의 트랙과 남의 트랙을 인정하고
겸허히 생명 자체인 나에게 순종해라 메세지를 듣는 때는 언제인가요?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