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의 나이테를 속에 감추고 자라는 나무처럼,
그대 안에, 그대 심장보다 더 가까이 있는
성스러운 빛을 항상 신뢰하기를.
그 빛 속으로 거추장스런 옷을 훌훌 벗고
알몸으로 나아가기를
그대 아침마다 해님과 어깨동무하고 길을 나설 때
언제나 행낭이 가볍기를.
행여 길을 걷다가 지치거나
불면의 괴로움으로 뒤척이는
영혼의 그믐엔 고요히 무릎 꿇기를.
자주 고독 속으로 들어가
바위처럼 입을 닫고 하늘에 귀 기울이기를.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기를.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천금 같은 이 순간을 놓치지 말기를.
땅에 떨어진 금화를 줍느라
별들의 황홀한 음악을 듣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꽃 피고 지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작은 풀벌레 소리에도 자주 감동하고
자비의 옷감으로 짜여진 우주에 늘 감사하기를.
뭘 좀 안다고 우쭐대지 말고
모름의 신비와
생명의 경이를
연인인 양 뜨겁게 껴안기를.
그대 영혼의 스승의 부름에 순명하고
생명의 빵을 곁님들과
나누는 데 인색하지 말기를.
그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숨결의 생명임을 항상 기억하기를.
한결 같은 젊음을 지니신 창조주를 닮아
백 년의 나이테를 속에 감추고 자라는 나무처럼
언제나 푸르고 정정하기를.
청파동 우리 사무실에서 샷슈 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20 미터 정도만 가면 처음으로 나오는 건물이 있는데 바로 청파감리교회이다. 나는 청파교회에 몰래 잘 다녀가는데 평일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예배실에 앉아 졸기도 하고 건물 앞에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내 머리 속처럼 뿌연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내가 두드리는 작은 문이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여분의 주보를 꽂아둔 작은 함이다. 청파교회 주보에는 읽을 거리가 참 많다. 책을 즐겨 읽으시는 목사님 덕분에 좋은 이야기 하나 시 하나를 소개받는다.
유난히 공동체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글들이 많은데, 신기하게도 때에 맞게끔 내게 필요한 충고와 격려의 글들이 실려 나는 주보를 쥐고 몇 번이나 울컥할 뻔 하기도 했다. 위의 시 역시 감동을 무려 수 차례 거듭하며 남영역 지하철 플랫폼 녹색 플라스틱 낡은 의자에 앉아 한 문장 끝내기를 아쉬워하며 찬찬히 소리 내어, 한 단어가 가진 소중한 의미를 놓칠까 조심스레 한 음절 음절 읽어 내려가는데, 나의 무아지경의 상태를 깨뜨리는 한 마디가 그 시공간을 침입했다. ‘증산도세요?’ 내 옆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은 거시는 나이든 아주머니 한 분. ‘네? 아니요. 이거 교회주보인데요.’ 하며 주보를 드리니 시를 가만히 읽어보시고는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하시며 의심에 찬 볼멘 소리를 내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일단 답은 했는데.. ‘평생 그렇게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까요?’ 라고.. 그리고는 기차가 와서 내가 먼저 자리를 떠야 했고 아주머니와는 마저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아주머니가 한 말이 자꾸만 내 마음을 콕콕 찌른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답지만 슬픈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외롬과 괴롬으로 질퍽거릴 때 조용히 무릎 꿇고 바위처럼 입을 닫고 영혼의 스승의 가르침에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덜 가지려 하고 존재하기를 더 많이 하려 하고 당장 내일의 걱정과 격정에 휩싸이어 지금의 이 고귀하고 찬란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진열된 현란하고 매혹스런 가치들에 눈과 귀와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샘터의 까만 밤이면 펼쳐지는 별들의 꽃밭과 어둠 속에 더 깊어지는 나무들과 바람이 함께 춤추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할 수 있을까?
사무실 거실에서 된장국 하나에 야채 반찬과 곁들어진 우리들의 맛깔 나는 이야기 소스 더해서 함께 밥 먹는 그 시간 충분히 누리며 그 때 우리 속에 자라나는 한 뼘 한 뼘의 신뢰의 양식을 감지할 수 있을까?
많이 알려 하기 보다는 지금 알아가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 들이며 깊은 숨과 함께 한 발 내딛기에 힘쓰고 갇힌 지식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있는 지식에 온 몸이 떨리는 순간을 경험하기를 힘쓸 수 있을까?
아무리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분이 하도 무심해 원망하는 마음 가지려 하다 그것 거두고 그 순간에 나지막히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에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나의 구주라 다시 고백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 감싸 안으며 다시금 그 분을 닮은 생명력 한 가득 내 몸을 채우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 진심을 다하기를 나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글쓴이 : 빛나는 호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