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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차 한잔에 그리운 쉼을 누리고 잠시 쉼에서 얻는 자유와 감사의 힘으로 peacemaker의 꿈을 꺼내 봅니다. 여전히 뒤죽박죽 작은 일들에 쫓기며 정신 없지만 내 안에 심어 주신 기쁨들 누리고 나누길 원합니다. 차 한 잔 추가~.^^
허니즈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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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발견하다.
전에는 "죄"를 잘 몰랐다.
진짜 죄라는 것을 전인격적으로 인식한 것은 신앙입문하고도 시간이 좀 걸렸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외형적으로 꽤 잘 나가는(?) 신앙생활을 한 5년 하다가 그제사 나의 원죄를 마침내 깨닫고 울고불고하며 한 획을 그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거듭난 것을 비로서 인정하고 사실 일회적 사건처럼 또 그렇게 내 젊은 날은 적당히(?) 뜨겁고 부대낌 없이 편하게 성장가도인 거 같았다. "죄"라는 것과 강렬한 만남을 갖었지만 옛사람의 전유물로 그렇게 떠나 보내고 잊혀졌고 그후 쉽게 살았다.

죄를 묵상하다
육아 전에는 크게  힘겨운 스트레스가 없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다면
그 상황을, 관계를 피하며 살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거 내 맘이 편한 것을 누리며 기꺼이 할 것도 넘치니 굳이 심경이 괴로운 상황을(사람을) 정면으로 직면할 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늘 합리화 했다.
육아는 자아도취에 살기 원하는 개인주의적인 내 본질적 죄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체력은 소진되고 전인격이 흔들렸다. 물론 도피는 커녕 외면도 할 수 없는 내 일상의 현장에서 자녀와의 관계 뿐 아니라 내 취향에 안 맞는 사람과도 대면해야 하는 상황은 "죄"라는 것을 아주 현실적이고 자세하게 들여다 보게 했다.
자아도취에서 깨어나 착각을 가능케 하던 얄팍한 포장지를 벗고 자기부인을 해야하는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속이고 사는 것을 묵인해 주던 "죄"를 떠나 보내던 첫 발견 때는 "죄"에 대해 무심했고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 몰입하며 행복했는데, 떡하니 내 곁에서 있는 "죄"는 마치 돌아온 애틋한 나쁜 옛애인처럼 나를 괴롭게도 하지만 예전에 알지 못했던 친밀함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자기부인"의 힘겨움에 지쳐있다가 엉뚱한 돌파구라도 찾던 마음이었는지 죄를 미화시켰다.  "죄"는 내가 "자아도취"에 빠져도 묵인해 줬는데 나를 편히 살게 해 주었는데... 심지어'그때가 좋았어' 하며 "죄"와 친밀감을 느낀다. 교감이 이루어진다.
분별력은 성령을 떠나는 나에게 안타까움으로 경고를 하고 옛 삶은 죄의 묵인 속에 평안했던게 아니라고 시한폭탄의 한계점까지 긍휼로 온유하심으로 예수님은 참고 기다려 주신 거라고 선하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진실하고 변치 않을 참 인생을 함께 누릴 착한 현재 애인을 보라고 정신차리라고 한다.    

은혜로 가는 통로
"자기부인"이 힘들어서 ...게으르고 편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성령의 일하심을 설득하려는 고집스런 나의 행태를 볼 때 가끔 정신나면 한심해서 또 잠시 넋을 놓는다.
내가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예수님 믿고 교회 공동체에서 성장한지 20년 나는 예수님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나는 내 죄성이 참 싫다.
그러면 단호하게 그것을 버리면 되는데 내 짧은 인내는 잘 안 되니까
그것을 모르고 살았으면 참 좋았겠는데 하며 유치하고 퇴보적인 생각도 가끔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시면 안되나요? 나 하나쯤...

사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아무리 잘난 재능이라도 객관적으로 존경 받을만한 인격이라도    

하나님께 받은 은사라는 확신이 있어도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듭나는 과정이 없다면
주시는 은혜 앞에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내 평범한 재능과 허접한 실력과 얄팍한 인품은...
오히려 받을 은혜가 더 할지도 모르는데 ...

나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누리기 위한 통로가 될 것이다.
죄가 큰 자 그 은혜도 클 것이다.
난 내 인생에 내 죄를 제대로 심각하게 깨달아 통회하는데 둔감했고 대의명분 속에 제 3자의 눈만 키워 온 거 같다. 내가 어릴 때 (20대)자신의 원죄를 세세하게 맞닥뜨렸다면 과연 지금 다시 이유식 달라고 떼 부리지는 않았을까? 아니 이유식도 단단한 식물도 다 안 먹겠다고 버티고 있는 나를 본다. 난 내 죄를 잘 몰랐고 죄를 좀 알 것 같으니 오히려 죄의 유혹에 빠지고 있다...
어쨌든 지나가야 할 통로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지치고 있다.

죄 속에 빠져 헤엄치다.
하나님의 은혜는 순전한 길이리라.
지름길이나 아무 영감없이 쉽게 가는 길은 은혜의 길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귀고 알아가고 있고 더욱 사랑하길 원하는 소원이 내 안에 있지만 고통과 괴로운 사연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본질이라는 진실에 대해서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많다.
순종하지 않고 말씀에 철저히 의지하지 않고 기도에 게으르고
쉼을 얻는 방법이 무책임하고
몸이 힘든 수고와 자기를(시간, 정신 등) 희생하는데 인색한...  
시간을 관리하고 규모있고 균형있게 사는 것과 거리가 먼
그래서 위축되고 두려움과 불평이 강화되는 ...
결론적으로 여전히 원래 생긴대로 사는게 생존전략이 되어버린 현실...


어디를 바라보는가?
머리와 가슴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협력하는데 동의를 했다.
몸과 감성은 핑계거리가 넘 많다. 산만하다. 실속없이 바쁘다.
내가 잔다르크 형이란다.
소소한 일상에 요령이 없을 뿐 아니라 수고에 동기부여가 잘 안된다.(사실 잘 못하니까 재미가 없다. 자체의 의미가 나를 붙잡지 못하니 나도 죄책감이 심하다.) 공적이고 추상적인 것에는 에너지가 생기는데 일상이 급급하니 둘다 접고 대충 사는 꼴이라 자존감도 엉망이다.
자기만족과 자기 의를 내세우고 싶은 거 같다. 별로 그렇지 않다고 믿어 왔는데 주께서 주시는 훈련의 장에서 뼛속 깊이 나의 반항심과 유치한 고집을 느낀다.
내 무릎까지 죄의 물에 빠져 있다
여차하면 물을 바라보다가 때떄로 유혹받는대로 엎드려 헤엄칠 수도 있고 잠수도 좋다고 무아지경에 들어갈 형편이다.
죽음이 그렇게 아래에 있고
생명은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에 내가 걸어가야 할 수면 위로 충만하다.
진리는 생명이니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생명이다.
보이지 않지만 그 생명은 진리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고 앞을 내다 보아야 한다.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더구나, 낯선 여행이다.
이제까지는 내가 바라고 선택한 인간적인 배경이 선명한 여행지를 가 보았는데 안전했다.
그래서, 본능적인 걱정은 없다. 다만 낯선 것에 긴장되는 것이 나혼자가 아니니까 매우 무겁다. 차라리 싱글이었으면 하지만 외로움의 처절함을 모르는 나로서는 가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경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선물 패키지 여행은 내게 맞춤일 텐데  내게 바라시는 분량의 성장을 내가 기꺼워 하지 않으니 내 신앙의 단계에서 어떤 훈계를 하실지 좀 두렵기도 하다.
   
걷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방콕족이다. 운동을 별로 즐기질 않는다. 뛰어 다닐 일은 없고 바쁘면 씩씩하게 걷는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성경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부르심은 "전력질주"이다. 내게 주시는 성장의 스타일을 바꾸길 원하시는 메세지 같다. 내가 경험한 "전력질주"는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하고 승리를 향한 강한 집념이다. 완전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장 모형은 그럴 수 밖에 없지만 혹 내가 그리는 이미지나 자세에 왜곡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좀 많이 긴장한다.
감당하기 벅찬 정도가 아니라 숨이 막혀서 순종의 문제로 돌입한다.
그래서 망연해서 질주는 커녕 가만히 서서 넋을 놓기도 하고 다리 아프면 주저 앉고 앉으니 눕고 싶고 그렇게 죄에 젖어 살아 보았다.
'풍삶기 인도자반'과 '파파기도'를 두고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기도가 참 급했지만 긴급한 만큼 오히려 풍..을 선택했다. 그리고, 내 영적 상태가 기도 시간에 오픈하는 것이 꺼려져서 피하고도 싶었다.
풍...은 강의를 듣고 체켕 역할 하면 된다고 했다. 근데, 조장이라니 "헉.."했지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누구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보호하실 줄 믿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를 다시 걷게 하시고 달리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혼자 있는가 함께 있는가?
지난 몇 달간 내 안에 기쁨이 메말라서 목말라 죽을 뻔 했다.(우울증)
기쁨이 없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교 중 김목사님이 전하셨다. 그 한 줄을 내 머리 명령체계 꼭대기에 적어놓고 전환점 삼으려고 애썼다. 내 영적 상태가 안 좋아서 사랑을 못한 건지 사랑을 애쓰지 않아 영이 다운 되었던 건지  중요하지 않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응급처치였다. 사랑하지 못하는 변하지 않는 내가 지겨웠고 더 사랑받고 싶은 조바심에 두려워 사랑을 버리고 싶은 위기의 내가 너무 초라하고 서러웠다.
우리 공동체 안에 내 남편 말고 나는 누구랑 얼마나 깊게 소통하고 사랑으로 돕는 관계인가? ... 없지 않다. 다만, 내가 힘들 때 홀로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고 방어적인 경계선이 분명하다. 또는 넘 사랑하고 아끼다 보니 배려하다가 내 짐을 주기가 싫어 망설이다 물러선다. 이게 내가 사랑하는 방법인거 같다. 누군가 나와 소통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 거리를 엄격히 준수해 주길 바라고 살아 온 거 같다. 존중이라는 미명아래 개인주의 사수... 홀로있기의 존중을 남발할 때가 있다.

설교중에 여러 번 말씀 하셨다. 내 주변에 가까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 인류를 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주신 그들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다.
꼽자면 또 넘 여러 명이다. 행복한 미안함이다. 그런데,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주님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 할만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대충해야 하나?  난 늘 에너지가 시간이 부족하다...
가교 가족들, 도서관 팀원들, 그리고 더욱 뒷전되기 쉬운 집가족들. 

 
무엇을 따라 어떻게 가고 있나?
나는 아직도 내 것을 주장한다.
내 시간, 내 취향, 내 소견, 내 그릇...
세월이 가면 좀더 너그러워지고 지혜와 용기가 더해지면 좋겠는데 거저 되지 않는다.
말씀의 강권은 늘 신실하시고 따라야 마땅한데 자기부인에는 이력이 붙지 않는 것 같다. 계속 새로운 마음으로 겸허하지 않으면 그 단순하고 마땅한 말씀이 한 없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방법이나 걸리는 시간이 좀 빠르고 지혜롭다고 한다. 이번에 넘어짐은 전치 3개월 짜리 였다.
꽤 큰 사고였다.
난 "죄"랑 바람을 핀거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내 남편이 힘겹게 부르심에 전력질주할 때 나는 부적절한(!) 배우자의 모습이었다.
"죄"는 자기랑 사귀고 질척해 지는게 얼마나 쉽고 또 중독성 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내 지각은 그리 둔하지 않다. 다만 내 유약한 속사람의 감성이 현실의 모험을 등지고 도피처를 찾기에 못이기는 척 고꾸라지는 것이다. "죄"는 예전에 내가 생각하던 것처럼 멀리 떠나지도 떠나 보낼 수도 없다. 내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언제나 대기 중이다.
'바람피는..'개념으로 다가왔으니 순결한 내 남편, 순결한 예수님을 생각하니 더이상은 정말 단호히 아니다. "죄"는 계속 나를 짝사랑하는 척 나를 기다리고 내 삶을 깨뜨리려고 내가 휘둘리길 기대하고 있다.
관계정리 주도권은 내게 있다. "쫑"

ㅎㅎ 내 맨토가 오래 전 내가 힘들어 울 때 위로해 주면서 살길을 알려 주었다. "십자가 말고는 해답이 없어~  십자가 내용 찬송가를 묵상하며 불러봐 기도가 되고 성령의 도우심을 붙잡게 된다~"

죄책감에 또 늘어져 있기는 예수님께 더욱 죄송하다. 화 많이 나셨을 텐데 담담히 나를 안고 가신다. 여행 가자고, 가던길 계속 걷자고...

난 오아시스 만나면 그 곳에 남겠다고 할 위인이다.
일행들에게 폐를 끼칠 돌발행위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좀 조금은 더 성숙하게 나를 부인할 수 있길 노력하련다.
말씀을 떠나서는 나침반을 버리는 것이고
기도를 안 하면 지도를 짐짝 속에 두고 보지 않는 것이다.
예배는 고단한 여정 중 재충전이요
공동체의 교제는 생존을 위한 끼니이다

이 여행 중 이러한 생존 전략을 모르는 나그네를 만나면  
나는 즐거이 내 것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나침반과 지도를 보여 주고 사용방법도 가르쳐 줄 것이고
우리가 도착 할 곳의 소망과  꿈꾸게 하시는 분의 인격을 찬양하며
우리의 만남이 이 여행의 이유였다고 겸손하게 전하고 싶다.
그리고, 도착지까지 고단한 여행을 하는 동안 서로 갖은 것을 나누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사랑으로 살아 남을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아시는 주
produced by daegwi, 2006

마음의 소원을 아시는 주 새로운 소망과 힘 주시네
1.
주님을 닮는 이 귀한 갈망...
주님을 따르리
2.
비할데 없는 풍성한 삶을..
주님은 주시네

http://inspiration.or.kr/tt/entry/마음의-소원을-아시는-주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냐?"
---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고, 그 은혜 앞에 담대한 것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해 보아라~"
---  늘 성령충만해서 자기부인을 할 수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죄성 때문에 쉽게 자고해 지든가  
반복되는 죄 때문에 자포자기로 고꾸라질려고 할 때
저의 강팍함과 연약함이라는 모순 속에서 너무 오래 제자리에서 맴돌지 말고
즉각적으로 은혜의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길 바랍니다.  

"그건 늘 충실해야 하는 기본이고, 현재 눈 앞에 꽉차 올라 기본을 위협하는 소원이 있느냐?"
--- 우리 가정이 함께 가야 하는 진로를 모색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가 함께 나누고 함께 부담갖을 수 있는 비전이라고 믿는데,
어찌 되든 어느 의미에서는 삶의 현장에서 첫발을 떼어야하는 부담을 안아 버렸습니다.

그것을 받아 들이고 성실로 헌신하기로 한 우리를
주님께서 안고 계시고 주님께서 일하실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믿음이 부족한 건지
그 비전 자체가 그냥 삶으로 풀어 나오도록 살면 그만이다 싶었는데
그 비전 자체가 나 같은 사람이 품기에는 왜 그리 크게 느껴 지는지
갑자기 외롭고
잔가지 많은 나의 구구한 넋두리를 겨우 삼키고 있는 제가 참 초라하고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배우고 나누고 가르치기도 하며 은혜를 입고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닮길 원하는 귀한 갈망이 우리 안에 있어서 참 감격스럽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삶을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새 힘도 넘치게 주시고 비할데 없는 풍성한 삶을 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깨끗하게 하시고
그 기쁘신 뜻을 붙잡고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내일, 그리고 앞으로 쭈욱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시니
그 소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저의 속사람이
늘 구하는 겸손을 연단받을 터인데
저의 약한 현실적 순종 자세를 기꺼이 연단 받고
주님께서 심어 주신 비전의 씨앗을 나누는 삶이 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제게 질문해 주시고 깊게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   최문철님

찬양하는 영감님께

늦오후 힘든(!) 일을 마치고
이 새로운 찬양을 묵상했어요. 애들이 박대받다가 할아버지댁으로 우루루 가서 잠시 한가~.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냐?"

찬양을 여러 번 듣고
몇번 따라 하다가
내 마음에 울리는 계시같은 질문이 들렸어요. ^^

'다 아시면서 물으시는군요. ...'
구구절절 주님께 아뢰는 시간을 열어 주는 찬양이었어요.
영감 가득하고 ...

목소리 상태도 매우 건강하고 절제가 느껴지는 호소력.. 기타소리 설레이게 생생하고
녹음도 깨끗해서 그냥 앨범에 넣어도 될 듯 ^^


<예수원>에서 퍼온 풍경



'지혜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
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갈 것이다.

내가 20대 초반에 예수님을 알아갈 때 내게 주신 기쁨이 가득한 소원이 있었으니
"저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가 되고 싶어요!" 라는 고백이다.
그 당시 나는 고난을 잘 모르고 즐거운 사람이라 정말 단순히 하라시는대로 찬양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찬양을 통해 신앙이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과 감사를 누리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아픈 곳도 없고 좀 미안한 맘도 있고 비현실적이었지만
남다른 긍휼의 은사가 있어서 중보하기에 성실했다.
영육의 치유를 위한 기도에 간절함이 남달랐던 것 같다.(5:13~16)

그 때 나는 어렸고 고생도 몰랐고, 갈등은 피해다닐 수 있었고
인생이 (예비하신 것에 순종한다는 전제라면) 선택만으로 예측도 가능하리라고 여기며
무사태평에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몽상가였다.
감히 피스메이커를 꿈꿀 수 있었던 담력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본래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전제를 믿었고 예수님의 제자도를 (copybook) 당돌하게도 쉬운 멍에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말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 있어서 달리 용기를 구하는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그때와 달라진 면모는 아줌마의 미학을 조금씩 알아가며
좀더 현실적인 겸손에 접근하고 희생과 은혜에 대해 고단한 필수과정을 이수중이라는 점이다.

10여년 만에 내가 꿈꾸던 인생의 자화상을 펼쳐 보았다.
블러그를 만들며 무슨 이름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곱게 접어 놓았던
철저히 자기몰입형을 추구하던 영역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아이를 갖기 전에는 더없이 자기몰입형이던
하나님을 믿지만 자급자족을 추구하던 나의 이분법적인 신앙이 아직 구석구석 숨어있다.
인터넷을 애용하면서 소통이 달라지고 아이들과의 육적인 분리의 여지를 약간 체감하면서
조심스럽게 내가 거듭나야 하고 회복되고 생성되어야 하는 부분을 찾고 있다.
 
이전의 내 모습에 대해 과장스런 미화를 하지 않길 지나친 위축으로 패배의식에 휘둘리지 않길 바란다.
제발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바둥거리는게 아니라
나를 특별한 작품으로 지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건강하게 드려지는 나를 만나고 싶다.

(계속)




예수원>에서 퍼온 풍경

야고보서 3장~5장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3:11,12)
악한 것에 속한 언행들의 특징도 같은 본질의 열매로 씨앗을 흩뿌린다. (3:14~16)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를 받지 않고 파종의 영향에 급하게 반응하게 되면 (대부분 감정이 앞서는)
오히려 처음 씨앗보다 더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를 낳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악한 것에 쉽게 반응하고
자신을 방어하려고 치졸하게 자기 것을 자랑하고
때로는 겸손한 척 자랑은 안 하지만 다른이를 폄하하여 스스로를 높힌다.
그렇게 양심에 꺼림을 외면하거나 인과응보라고 일축하며 스스로를 속인다.

나는 자녀와의 갈등상황에서는 늘 감정이 과다노출 되지만
그 밖에는 갈등 자체에 과민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화를 잘 안 내고 좋게좋게 넘어 가려고 조절하는 편이다.
어쩌면, 현실을 직시하는게 귀찮아서 대충 넘어가기도 할 거다.
그런데, 어쩌다 내 예민한 기질이 확 평정을 잃고 분개하는 상황이 생기면
속사포의 독설이 면면히 분석파워 최강으로 오르고
치사하게 육하원칙에 근거한 과거사를 들춰 대면서 나의 비난의 근거가 얼마나 선명한가
줄을 그으며 명백한 논리를 쏟는다.
대부분 그런 상황의 대상은 모호한 불특정 다수이거나 나말고도 다른이를 열받게 하는 공통분모를 들이댄 사람...등

그리고, 그렇게 피곤한 내용을 피곤한데도 들어주는 사람은
억울하게도 울 남편이다.
나는 간만에 마이크를 잡고 그 동안 다 못한 말수를 채우려는 듯 흥분하여 오버 프러스하며
방백을 한다. 사실 맞장구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울 남편은 시끄러운 스피커 바로 앞에 앉아서 듣는다.
처음에는 공감하는 차원도 보이며 경청의 자세를 보이고 - -
시간이 지나면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지만 침묵과 함께 어항을 바라보고 - -;
몇일 후 내 뼈가 상하는 자조와  변함 없는 반복구조가 보이면
엄한 권면을 한다.  "이제 그만 하지?"
그 말이 좀 기분 나쁜 건 아무 맞장구도 필요 없고 혼자 떠들고 싶은 무아지경을 즐겼기 때문인 거 같다.
시간이 지나면 부끄럽고
그 고약한 냉소를 들어서 영혼이 피곤했을 남편에게 넘 미안하고
첨에는 좀 야속해도 남편이 또 존경스럽다.

난 거룩한 의분에도 민감하지만
내 기질과 취향을 배경으로 객관적인 사실보다 과도하게 "이런 건 싫다"라고 반응하는 상황이 있다.
먼저 돌을 던진 건 내가 아니지만
가끔 나는 나도 몰랐던 돌이 가득한 바구니를 옆에 두고 마구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그 코 앞에는 안 던졌지만
결국 내 곁에 있던 내 남편과 내 자신이
돌이 떨어진 곳이 얕은 구정물통이라서 그 더러움을 온통 뒤집어 쓴 결과를 보게 된다. (3:1~12)

어쩌다 이렇게 해로운 폭풍이 지나고 나면 나는 영혼이 몹시 상한다. 몸이 아프기도 하다.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았기에 그 죄가 나를 상하게 한 것이다. (4:17)


나를 비겁함으로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며 (연단중인 사연으로) 용납하고
화평케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친절하고 온순한 언행으로
주께 드리듯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3:17)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사30:15)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때로는 이렇게 성령의 다스리심을 잊거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 선한 의지에 대해 '가증스럽다, 또 다른 위선이다'라고
자신의 편견으로 방어와 공격을 휘두른다.
매우 씁쓸하다.

열쇠는 '언제 멈추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3:13)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지혜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의 안정된 규격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랜 세월 한 개인에게 주신 연단이 인내를 통하여 탁월한 성품과 선한 영향력을 끼칠만한 삶을 빚어낸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완료"된 온전함은 없다.
다만, 그 훌륭한 지체는 동일한 혼란 가운데 속사람의 두 가지 마음의 다툼에 대해
얼마나 민첩하게(자연스러울정도로)  자신의 소욕를 내려 놓고 성령을 의지하느냐
거기에서 질적으로 성숙한 삶으로 구분이 보인다.(4:1~10)  

그리고, 참고 견디는 달인이 되어야 한다. (5:7~9)
이른비와 늦은비의 때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으니 그 은혜의 경험으로
주님을  잠잠히 신뢰하며 마음을 지켜야 한다.
크신 사랑과 풍성한 긍휼로 우리를 만지시는 주님을 바라며
그 긍휼을 받은 자로서 내 안에서 그 긍휼이 흘러 가도록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않고 (맹세하지 말고) 참아야 하는 것이다.
참지 않으면 긍휼이 흘러 갈 수도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도 없고
그곳에는 생명이 평안이 자랄 수 없게 된다. (5:10~12)


'지혜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
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갈 것이다.
이름하여, 피스메이커 또는 '화평케 하는자'.


















몇 일 동안 이어서 큐티를 하려고 한다.

본문 (마16 :15~21)

첫날(8/6)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

질문을 주신다.
내 주변이든 현사회에서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귀기울여 보고 인식하라고 하신다.(13절)

현재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바른 개념 만큼 중요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얼만큼 친밀한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고 있는가? (15절)
    
영적인 질문에 대한 인식이나 그 안에 답을 찾는 것 또한 성령께서 도우셔야 가능하다.(17)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에게는 새 이름을 주시고,
새로운 세계에 눈뜨는 경험과 하나님의 안목을 갖게 하셔서 새로운 인생을 열게 하신다.(18)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을을 이기고 사셨기 때문에(댓가를 치루시고)
믿음으로 죽음을 이길 능력을 받았다.(18)

우리를 창조하시고 거듭 새생명을 주셨지만 인생의 행로는 나의 선택에 맡기셨다.
하나님 형상대로 '자유의지'를 주셨다.(19)
   
예수님의 이름, 그 비밀스런 능력을 받은 은혜를 잠잠히 지키라고 하신다.
그 은혜를 나누어야 할 주께서 정하신 때가 따로 있다. (20)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다--- 예고하셨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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